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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할매 이야기

*지면 기사의 실물 편집은 본 기사 아랫쪽에 첨부된 pdf파일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사가면 해코지한다’는 낭설, 영도 할매 바로보기


"할매, 그 동안 오해해서 미안해요"

 

 

영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흰여울 문화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선동 언덕. 봉래산 중턱을 오르다보면 영도의 구전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영도구 신선동 3가, 산제당길 246. 


영도를 지키는 산제당(山祭堂)과 아씨당(阿氏堂)이 이 곳에 있다. 아씨당은 하씨 하씨 신당(河氏神堂)이다. 하씨 신당의 원래 위치는 1908년에 설립된 사립 옥성학교(玉成學校) 옆의 수목 가운데 있었는데, 이 학교가 폐교되고 1941년에 영도공립보통학교(현재 영도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학교 부지 확충을 위해 하씨 신당을 헐게 됨으로써 현 위치인 신선동 계곡으로 옮기게 됐다. 

 

1942년에 세운 제당들이 낡아 1995년 음력 8월 19일부터 개수를 시작해 12월 3일에 마쳤다. 당의 건물 면적은 15.2㎡ (4.6평)로 기와 우진각 지붕에 벽은 블록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했다. 

제단은 77㎝의 높이에 두께 2㎝의 화강암 대리석을 ⊓형으로 놓았는데, 제단 위에는 여신도가 끼어 있는 유리 액자가 두 개 걸려 있다. 오른쪽이 ‘삼신 제왕 할매’이고, 왼쪽이 ‘아씨 할매 다. 두 제당의 주위에는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돌담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놓았다.
 

아씨당과 산제당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적혀있다. 

[산제당과 아씨당 전설(Story telling)]

 

영도 봉래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산제당과 아씨당은 신라시대부터 절영도에 있던 국마장에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시대 절영도에서 말을 실어갈 적에 서쪽으로 끌고 가면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군마관 책임을 맡고 있던 부산진 첨사가 골머리를 앓았다. 그 때 '한 선녀가 노복 두 사람을 데리고 절영도로 들어가는 것을 봤는데, 선녀가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무렵 정발이라는 무관이 부산진 펌사로 부임했다. 장군은 키가 6척에 어떤 일도 겁내지 않았다. 

 

장군은 항간에 나도는 이야기로 미루어 군마들이 까닭없이 죽는 것은 그 선녀의 까탈이라고 의심하던 어느 날, 꿈에 이상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었다. 

 

"이 몸은 칠원성군인데, 옥황상제가 등극하여 천상에 있지 못하고 탐라국 여왕이 되었습니다.  고려 최영 장군이 탱자나무로 둘러진 성 둘레에 갈대를 심어 불을 댕겨 마침내 탐라국을 함락시켰습니다. 저는 장군의 첩이 되어 일편단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장군은 제주도를 떠나고 나랏일로 바빠 수 삼년 동안 소식을 끊었습니다.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저에게 신돈의 모함으로 장군이 절영도에 유배됐다는 소식이 들려 그 길로 이 곳, 절영도에 왔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절영도에 온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몸은 사고무친의 이 곳에게 한 많은 청춘을 마치고 고독한 영신이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데 저를 위하여 사당을 지어 고혼을 위로해주면, 군마가 죽는 것을 막아드리고, 장차 이 곳에 사람이 살게 될 때 태평무사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더불어 드릴 말씀은 나를 모시는 사람은 만사 형통하고 소원 성취할 것임을 아룁니다. "

 

정발 장군이 꿈 이야기를 조정에 아뢨더니, 임금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하명하여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봄가을에 당제를 모시게 하였다. 그 이후 군마가 폐사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산제당과 아씨당에 전해지는 전설은 영도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설화이며,  제당 설립과 기원을 밝히는 당 신화다. 신화는 정발, 송상현, 최영, 신돈 등 역사적 인물을 배치한 흥미로운 스토리다. 이 전설은 영도가 오랫동안 국마장의 기능과 제주도 주민들의 이주 등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설화다. 산제당과 아씨당의 당제는 매년 2회 음력 1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를 지내며 3년마다 한 번씩 전체 구민이 참여한다. 

 

 

산제당과 아씨당은 원래 영도초등학교 부지 안에 있던 것을 1915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산제당의 위치는 영도구 신선동 2가 141번지로, 산신제 성격은 영도구 어민의 만선을 기원하고 구민의 수복을 지원하는 제례행사다. 할배 당제- 아씨 당제- 사천- 왕장군님 할배당- 용왕 당제- 공목 할매제 순서로 진행한다.


아씨당은 탐라국 여왕을 모시면서 군마만 잘 자라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제주를 오가는 뱃길이 순조로워지고 제주 사람이 찾아와 영도를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했다. 외지인과 제주 해녀가 영도에 뿌리내려 생활 터전을 만든 것도 아씨당의 탐라국 여왕이 보살펴주는 덕분이라고  전한다. 
순박하고 물과 가까이 했던 영도주민들의 안녕과 풍요를 지켰던 아씨당의 영도 할매가 심술많은 할매로 악마화 된 데에는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신화가 변질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산시의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도 영도의 봉래산 지명 변천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을 자세히 기술한다. 

 

[봉래산은 절영진의 3대 첨사인 임익준(任翊準)이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봉래산은 본래 도교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봉래산이라는 이름은 신성함을 뜻해 여러 지역의 산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지명 변화 과정을 보면, 산의 형태가 고깔을 닮아서 고갈산 또는 꼬깔산으로 붙렀다고 전하지만, 한자명 표기는 목이 마른 산을 뜻하는 고갈산(枯渴山)이다. 이는 땅의 기를 없애고자 인위적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도 산 모양을 따서 붙은 지명으로 알아 고갈산으로 불렸다가, 부정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봉래산으로 개칭되었다. 고갈산이 봉래산으로 바뀐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1980년대 초반의 지형도에서는 고갈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영도의 대표 명산인 봉래산의 이름도 기를 꺾고자 하는 의미에서 고갈산으로 변경했듯이 영도 토착민들에게 안녕을 기원하며 마음의 안정을 주었던 영도 할매 역시 악마화를 통해 그 기를 꺾어놓았다는 것이다.


영도 주민들의 노력을 통해 영도할매의 억울함은 한층 풀릴 예정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영도 주민들을 지켜줬던 영도의 수호신, 영도 할매. 영도 할매 의미의 바른 정립을 시작으로 영도 독립신문의 창간호를 열고자 한다.